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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6. 주일설교 아름다운 발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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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손종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7-16 11:31 조회 Read316회 댓글 Reply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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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제 목: 아름다운 발이여! How Beautiful Are the Feet!
ㅇ 설교자 : 이 아브라함 목사
ㅇ 본 문: 로마서 10:9-17

로마서 10:9-17 (개역개정)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4 (개역개정)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히브리서 11:8 (개역개정)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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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브라함님의 댓글

이아브라함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Date

2023년 7월 16일  로마서 10:9-17  “아름다운 발이여!”,  “How Beautiful Are the Feet!”
얼굴이 아름답다. 손이 아름답다, 몸매가 아름답다는 말은 많이 들어도 발이 아름답다는 것은 어감 자체가 생소합니다.  사실 발은 제일 밑에서 온 몸을 지탱하는 중요한 부분이면서도 더럽고 냄새나는 지체라고 생각되어서 사람들은 가급적이면 남에게 발을 보이지 않으려고  버선이나 양말로 감추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맨발을 아무 데서나 함부로 내미는 사람을 교양 없고 버릇없는 사람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발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한국의 박세리라는 골프선수의  벗은 발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1998년 미국여자프로 골프대회인US Open 에서 박세리 선수가 친 공이 물가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박선수는 할 수 없이 양말을 벗고 물속에 들어가서 볼을 쳐내는데 성공했고, 그 결과 극적으로 우승을 하며 US Open Golf 대회에서 아시아권 최초의 우승자가 되었습니다. 그 때 그 하얀 벗은 발은 전 세계에 중계되며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한국의 유도선수 하형주선수는 1984년 로스앤절스에서 열린 올림픽대회의 무제한급 유도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 후에 그가 tv에 출현했는데 진행자가 그 선수에게 양말을 벗고 발을 보여주게 했습니다. Tv 화면에 비친 그의 발크기가 33센치 크기인지라 그 후부터 그는 “왕 발”이라는 별명으로 더욱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사도가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의 믿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난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10:1-4)
바울이 보기에 당시의 이스라엘은 어떻다는 것입니까? 그들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다고는 하나 하나님의 의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오직 자기들의 율법적행위로 구원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의 혈통을 따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며 스스로 의롭다고 믿고, 구원 받았다는 확신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수천년 동안 지켜온 율법생활은 그들에게 이미 전통이며 문화로 자리잡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다. 라는 공허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지식 곧 하나님의 말씀에 무관심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심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생활을 통해서 자기 의를 세우고자 힘쓰다 보니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결코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완전히 해결하셨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선포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9절)
네가 아무리 열심히 율법생활을 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해도 그것이 너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너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예수님에게 너의 생명의 주권을 맡기라. 는 것입니다. 죄인은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자기의 인생의 주인인 삶을 포기하고 예수님께 생명의 주권을 맡겨 드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이미 구원 받았다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사람들에게는 마음 아픈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손이라는 것을 싸그리 무시하는 발언이었기 때문이지요. 신앙적 자존심이 엄청나게 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그를 핍박하고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아브라함의 신앙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를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즉시 순종하고 떠났습니다. 이것은 자기 중심의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의 주권을 맡겨드린 믿음의 출발입니다. 오늘 칼럼에 쓴 것처럼 코람데오인가 아니면 코람호미니부스인가 다시 말하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인가, 아니면 사람 앞에서 사는 삶인가의 문제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며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브리서 11:8) 절대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주님이시며, 그의 인생에 가장 우선적인 분이시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취미생활이나 선택사항으로 정도로 여기는 현대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앙의 자세입니다. 노아의 이야기를 해 볼까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홍수를 대비하여 엄청난 규모의 배를 만들어라고 하셨을 때 그는 즉시 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노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배는 만들지 않고 농사만 짓고 있었다면, 그는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구원 받았을까요? 
바울 당시의 이스라엘은 전통적, 습관적 율법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었을 뿐 하나님께 주권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이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2천년전의 이스라엘의 문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한국에 그리스도신앙이 전파 된지 이미 백 삼십년이 넘다보니 신앙생활이 하나의 문화나 전통처럼 자리잡은 것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이암았느니라. (17절)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는데, 말씀이 소홀히 여겨지다 보니 엉뚱한 데서 근거를 찾게 됩니다.  우리는 대대로 기독교집안이다.  나는 모태신앙이다. 우리 가정에 목사, 장로가 수두록 하다. 등등…
우리들의 자녀들도 어릴 때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라다 보니 이미 기독교 문화와 교회생활의 전통에 익숙해져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구원 받았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마치 2천년전 이스라엘이 지식 곧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명목상의 근거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에서 주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퀴리오스” 로서 당시 사회에서 종의 소유주 혹은 통치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종은 주인인 퀴리오스를 위해서 사는 삶 밖에는 없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이십니까? 그렇다면 그 증거가 무엇인가요?
만일 예수님께, “예수님 당신께서 이아브라함목사의 주인이십니까?” 라고 여쭈어 보면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일까요? 여러분 중 누구에게 질문을 할까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절)는 말씀은 보이지 않는 마음 속에 예수님을 주로 영접했다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며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삶으로 나타나는 신앙의 진실성을 뜻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행위가 따라오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2천년전 로마에서 예수를 주로 시인하기 위해서는 핍박을 감당해야 했고 심지어는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 그리고 우리 자녀들의 신앙이 얼마나 진실한지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그 다음으로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도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성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2,13절)
유대인들은 자기들 만이 구원 받을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만심이 있었으므로, 헬라인을 멸시했습니다. 여기에서 헬라인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모든 다른 민족들을 말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은  당시에 전혀 다른 관습과 종교를 가진 사람들로서 결코 섞일 수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에게는 이 말 역시 매우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성은 누구든지, Whosoever… 차별이 없습니다.
이런 차별 현상은 현대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육정도, 부의 정도, 사회적 지위, 가정형편, 정치적성향, 지방색,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차별적 현상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내에서도 계급의식이 작용하고, 심지어 목회자들 간에도 높 낮이가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지요. 주님의 구원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부요하신데 말입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주셨고, 이 세상 모든 인생 하나 하나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대부분 한국인들이 싫어하는 일본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주셨습니다.  마치 저주 받을 것 같은 김정일이나 김정은이를 위해서도 예수님은 목숨을 주셨습니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히스패닉이든, 인디언이든, 에스키모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 받은 우리의 형제 자매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를 사랑하며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함께 동역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사도는 우리에게 전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진정 구원 받은 확신이 있으면, 이 구원의 복음을, 이 기쁜 소식을 모르는 이들에게 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의 확신의 외적 증거입니다.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 그런데 믿지 않는 이를 어찌 부르겠습니까?
-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을 수 있습니까?
-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을 수 있습니까?
-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겠습니다.
결국 우리 자신들의 문제 입니다. 주님은2천년전 우리를 복음의 전파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느니라. (마 28:19-20)
전도자의 발, 복음을 품고 전하러 가는 저와 여러분의 발을 아름답게 여기시는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 자신은 얼마나 아름답게 보실까요? 정말 창세때에 사람을 창조해 놓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다던 하나님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듭니다. 
제가 오늘 서두에 박세리와 하형주선수의 발 이야기를 했지요? 그들이 우승을 하지 못했더라면 그 발은 관심대상이 아닐 뿐 아니라 결코 매스컴에도 뜰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복음을 품고 가는 전도자의 발은 비록 세상은 관심이 없을지라도 성공과 실패와 상관 없이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여기십니다. 여러분의 전도대상자가 예수님을 영접하든 아니든, 교회에 나오든 말든 그것은 그들의 문제이구요. 하나님은 오직 전도자의 발 그 자체, 전도하고자 나서는 마음 자체를 귀하게 여기시고 아름답게 보신다는 말입니다. 전도자의 발이여, 아름답도다. How beautiful are the feet!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이미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멀리 나가는 것보다 우선 가장 가까이에 있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부터 예수님의 구원을 전하십시다. 세상 사람들이 믿던 않믿던 그것은 그들의 문제이고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던져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복음전도의 준비가 않되어 있으면, 교회가서 들으라고 초청하기 바랍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교회가면 발목 잡힌다고 잘 안 옵니다. 그러면 이번주일 딱 한 번만 오라고 하세요. 그 한 번 들은 말씀으로 누군가 구원 받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매주 이렇게 한 사람씩만 모시고 함께 예배에 오세요.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께 칭찬을 받겠습니까? 주님의 복음을 가지고, 주님의 심정을 품고 가서 입을 열어 전도함으로, 한 영혼을 위해서 찾아 나서는 발걸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감탄하실 것입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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